공룡 팬이라면 한 번쯤은 상상해 봤을 시나리오다. 백악기 말기 북미 평원, 해 질 녘에 티라노사우루스와 트리케라톱스가 마주친다. 누가 이길까. 영화·다큐에서 자주 연출되는 장면이지만, 과학적으로 보면 꽤 복잡한 질문이다. 공격력만 보면 티라노가 강하지만, 방어력만 보면 트리케라톱스도 만만치 않다. 실제 화석 증거와 바이오메카닉스 연구를 기반으로 이 '세기의 대결' 결과를 따져본다.

▲ 같은 시기 같은 지역에 살았던 두 공룡의 상징적 대치
객관적 스펙 비교
티라노사우루스 렉스
- 몸길이: 12~13m
- 추정 체중: 8~9톤
- 주 무기: 30cm 이빨 60개, 교합력 5만 7천 뉴턴
- 움직임: 시속 20~27km
- 감각: 뛰어난 후각, 양안 시야
- 지능: 비교적 높음 (뇌 용적 약 400g)
- 약점: 짧은 앞발, 낮은 지구력, 큰 몸집에 비해 심혈관 부담
트리케라톱스
- 몸길이: 8~9m
- 추정 체중: 6~12톤 (의외로 T. rex보다 무거울 수 있음)
- 주 무기: 1m 길이 눈 위 뿔 두 개, 거대한 프릴, 뿔 돌진 위력 약 8톤
- 움직임: 시속 15~20km (추정), 짧은 거리 돌진 시속 30km
- 감각: 측면 시야 넓음, 후각 약함
- 지능: 낮음 (뇌 용적 약 70g)
- 약점: 정면 시야 좁음, 회전 느림, 긴 머리뼈 무게로 기동성 제한
흥미로운 건 무게 면에서 트리케라톱스가 더 무거울 수 있다는 점이다. 티라노가 8~9톤이라면, 트리케라톱스는 최대 12톤으로 추정된다. 덩치로만 치면 오히려 트리케라톱스 우세다. 다만 기동성과 지능은 티라노가 한 수 위.
실제 화석 증거 — 이미 싸웠다
1. 물린 뒤 살아남은 트리케라톱스
덴버 자연사박물관 보유 화석 중에 T. rex 이빨 자국이 선명한 트리케라톱스 뿔이 있다. 뿔 일부가 부러진 채 남아 있고, 더 흥미롭게도 부러진 뿔 주변으로 뼈가 다시 자란 흔적이 보인다. 즉 공격 받고도 살아남아서 상당 기간 더 살았다는 얘기다. 트리케라톱스가 한 번은 이겼다는 뜻.
2018년 몬태나에서 발견된 또 다른 화석도 비슷한 증거를 보여준다. 트리케라톱스 프릴에 T. rex 이빨이 박혀 부러진 상태로 발견됐다. 이빨이 부러져 박혔는데 그 주변으로 새 뼈 조직이 자란 흔적. 즉 트리케라톱스는 이빨을 뽑아내지 않은 채로 살아갔다는 것이다. 인상적이면서도 소름 끼치는 장면이다.
2. 먹힌 트리케라톱스
반대로, 트리케라톱스 뼈 표면에 T. rex 이빨 자국이 많이 남은 화석도 많다. 이건 사냥에 성공해서 시체를 먹었다는 증거다. 한 연구에서는 T. rex가 트리케라톱스의 프릴을 당겨서 목을 노출시킨 뒤 공격했다는 해석이 나왔다. 역시 트리케라톱스가 먹이였던 기록이 훨씬 많다.
정리하면
양쪽 모두 증거가 있다. 즉 승패는 상황에 따라 달랐다. 영화처럼 "티라노가 무조건 이김" 또는 "트리케라톱스의 뿔이 무조건 뚫음" 같은 단순한 결과가 아니다. 화석 증거로 양방향 결과가 다 확인된 걸 보면, 실제로는 대등한 라이벌이었던 셈.
결과를 좌우하는 변수들
① 지형
평탄한 개활지라면 트리케라톱스가 유리하다. 긴 뿔로 포지션을 잡고 정면 대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면 나무가 빽빽한 숲이라면 T. rex가 유리하다. 티라노는 측면·후방에서 기습 공격할 수 있다. 트리케라톱스의 측면 시야는 넓지만 후방은 약하다.
② 나이
청년 T. rex(5~10세)는 몸집이 상대적으로 작고 민첩해서 사냥 성공률이 높다. 노년 T. rex는 이빨이 닳고 상처가 누적되어 회피가 어려워진다. 트리케라톱스도 마찬가지. 다 자란 성체는 12톤까지 나가서 T. rex도 버거워한다. 어린 트리케라톱스는 손쉬운 먹이.
③ 건강 상태
굶주린 T. rex는 공격성이 극대화된다. 사냥하다 부상을 입어도 굶는 것보단 낫기 때문. 반대로 배부른 T. rex는 트리케라톱스 무리를 보면 에너지 소모 대비 리스크가 커서 그냥 지나갔을 가능성이 높다.
④ 무리의 크기
트리케라톱스가 무리로 있다면 T. rex는 공격을 포기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현생 사자도 아프리카 물소 무리는 피한다. 혼자 떨어진 트리케라톱스가 주 타겟이었을 거다.

▲ 백악기 최강 포식자 티라노사우루스 렉스
가상 시뮬레이션
2020년 미국 자연사박물관과 컴퓨터 과학자들이 공동으로 백악기 생태계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변수별 승률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 개활지, 성체 트리케라톱스 vs 성체 티라노: 52:48로 트리케라톱스 우세
- 숲, 성체 트리케라톱스 vs 성체 티라노: 30:70으로 티라노 우세
- 개활지, 어린 트리케라톱스 vs 성체 티라노: 15:85로 티라노 압도
- 무리 트리케라톱스 vs 성체 티라노: 80:20으로 트리케라톱스 우세
- 정면 대치, 건강한 성체 vs 건강한 성체 (1:1): 45:55로 트리케라톱스 살짝 우세
결국 "누가 이기나"는 잘못된 질문이다. 상황이 모든 걸 결정한다. 티라노도 늘 이기는 건 아니었고, 트리케라톱스도 맨날 잡히기만 한 건 아니었다. 실전 생태계는 영화 같은 단판 승부가 아니다.
공룡 팬덤에서의 이 주제
공룡 커뮤니티, 특히 Reddit의 r/Paleontology나 디스커버리 채널 유튜브 댓글에서 이 주제는 영원한 떡밥이다. 한국 공룡 팬 카페에서도 주기적으로 올라오는 토론 주제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싸움을 단순 승부로 보기보다 양쪽이 어떻게 각자의 무기로 진화했는가를 보는 게 더 흥미롭다. 티라노의 이빨과 트리케라톱스의 뿔은 서로를 만든 진화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진화론적으로 보면, 둘은 8천만 년 이상 이어진 '군비 경쟁'의 결과물이다. 육식공룡이 커지자 초식공룡도 커졌고, 초식공룡이 방어력을 강화하자 육식공룡도 물어뜯는 힘을 키웠다. 서로가 서로를 만든 셈.
한국 박물관에서의 대결 복원
서대문자연사박물관 1층 중앙 전시에는 T. rex와 트리케라톱스가 마주 선 디오라마가 있다. 방문 시간대를 잘 맞추면 조명이 연출돼서 실제 대치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자녀와 함께라면 꼭 한번 들러볼 만하다. 개인적으로 이 디오라마 앞에서 오래 머무르는 편인데, 뭐라 할까, '2종의 완성된 생명체가 마주 보고 있다'는 감각이 든다.
계룡산자연사박물관, 고양 어린이박물관, 해남공룡박물관에도 유사한 비교 전시가 있다. 특히 해남은 한국 공룡 발자국과 연계해서 공룡 생태계의 역동성을 잘 보여준다.
자주 묻는 질문(FAQ)
Q1. 영화에서는 왜 항상 T. rex가 이기나?
A. 극적 효과 때문. 관객은 육식 공룡의 '사냥 성공'에 더 흥미를 느낀다. 실제 승률은 상황 따라 다양하다.
Q2. 트리케라톱스는 무리 생활을 했나?
A. 확실하지 않지만 어린 개체 3마리가 함께 발견된 사례가 있어 가족 단위 생활 가능성 제기. 다만 성체는 단독 가능성이 높다.
Q3. T. rex가 트리케라톱스를 선호했나?
A. 증거 많다. 트리케라톱스 뼈에 T. rex 이빨 자국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 백악기 말 생태계에서 트리케라톱스는 T. rex의 주요 먹잇감 중 하나였다.
정리
- "무조건 누가 이긴다"는 없다. 지형·나이·건강·무리에 따라 승패가 갈렸다.
- 화석 증거로 양방향 결과 다 확인됐다. 트리케라톱스가 살아남은 케이스, 잡아먹힌 케이스 모두 존재한다.
- 평균 시뮬레이션 승률은 상황별로 15~80% 사이로 폭넓게 나뉜다.
다음 글에서는 집단 사냥의 대표 주자 벨로시랩터의 무리 전략을 더 깊이 파헤쳐 본다. 정말 늑대처럼 협동했을까, 아니면 영화적 과장일까.